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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고산교회 설립 — 천막에서 벽돌 예배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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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온양읍 남창지역으로 교회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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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최윤식 목사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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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기도소에서 교회로 재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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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현 예배당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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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설립 60주년 기념 예배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내고산리에 자리한 고산교회는 196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시작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교회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몇 사람의 이름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바다 건너에서 보내온 손길부터 말씀드려야 합니다.
한 사람의 부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5년)
고산교회의 시작은 거창한 계획이나 큰 재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탁 한마디였습니다.
이 마을, 고산리 출신인 차영배는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오래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도사였던 신봉선 전도사에게 자신의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탁을 받은 신봉선 전도사는 1965년 여름, 안고산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마을 청년에게 빌린 작은 마이크 한 대가 전부였습니다. 전도사는 매일 마을을 돌며 복음을 전했고, 따가운 여름 햇볕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1965년 6월 3일, 빌린 마이크로 복음을 전한 그날 저녁에는 신명구 목사와 김정태 목사를 비롯한 성도들도 안고산을 함께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두 마을의 이장이 복음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이 먼저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이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설 수 있는 문이 열렸다는 뜻이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손길, 네덜란드 흐로닝언
교회를 세우려면 예배할 자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고산의 이장과 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돈도 없었습니다.
이때 도움의 손길은 뜻밖의 곳에서 왔습니다. 차영배는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 있었고, 그곳에서 흐로닝언(Groningen) 교회의 ‘코리아 행동대'(Actie-comité-Korea, ‘코리아 전도단’) 후원을 주선했습니다.
1965년 7월 3일, 네덜란드 주간지 『더 레포르마치』(De Reformatie)에 신봉선 전도사가 그해 6월 9일에 쓴 편지와 함께 후원을 요청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편지는 차영배가 직접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응답했습니다. 흐로닝언 교회의 여성청년부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안고산이 어디인지도, 신봉선 전도사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손뜨개질로 장갑과 목도리를 만들어 판 돈을 매월 모아 보내주었습니다. 옷과 가방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 손뜨개질이 곧 그들의 아르바이트였고, 그렇게 번 돈이 이 마을 예배당의 건축비가 되었습니다.
이 관계의 시작에는 이근삼 박사를 통해 열린 고신 교회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오랜 교류가 있었습니다. 고산교회는 그 교류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 교회입니다.
가난한 교회가 더 가난한 교회를 도왔습니다
도움은 바다 건너에서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남창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당 건축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허덕만 장로와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남창 교회는 교인이 50여 명 남짓한 작은 교회로, 담임목사의 생계조차 책임지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자기 목사의 생활비도 빠듯한 교회가, 아직 건물도 없는 이웃 마을 교회의 예배당을 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고산교회는 그 시작부터 여유가 있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없는 중에 나누는 것이 교회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며 세워졌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분이 내어준 땅
예배당이 설 땅은 마을의 종가(宗家)에서 나왔습니다. 차 씨 종손의 조부가 대지를 기증한 것입니다.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를 믿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땅을 내어준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 땅 위에 교회가 섰습니다.
그리고 그 기증에 담긴 뜻은 한 세대를 건너 이어졌습니다. 훗날 그 손자인 차재국은 이 마을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인이 되었고, 고신대학교 선교언어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조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훗날 텅 비어버린 교회 건물을 홀로 지켜냅니다. 그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965년, 천막에서 벽돌 예배당으로
이렇게 하여 1965년 고산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천막 교회였습니다. 그 후 흐로닝언 청년들이 보내온 후원과 남창 교회 성도들의 수고가 모여 벽돌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정리하면, 이 교회의 기초에는 다음 다섯 가지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 무엇이 | 누구를 통해 |
|---|---|
| 부탁 한마디 | 고산리 출신 차영배 |
| 빌린 마이크 한 대의 전도 | 신봉선 전도사 |
| 손뜨개질로 번 후원금 | 네덜란드 흐로닝언 여성청년부 |
| 없는 중에 보탠 건축의 수고 | 남창 교회 허덕만 장로와 교인들 |
| 예배당 대지 | 차 씨 종손의 조부 (당시 불신자) |
이 다섯 가지 가운데 고산교회 자신이 마련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교회는 처음부터 받아서 시작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옮겨 가고, 건물만 남았습니다 (2000년 무렵)
세월이 흘러 2000년 무렵, 시무 목사와 교인들이 온양읍 남창지역으로 교회를 이전했습니다.
교회가 스러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옮겨 간 것이었고, 본래 자리인 내고산리에는 예배당 건물만 남았습니다.
그 빈 건물을 지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재국 장로였습니다. 예배당 대지를 기증했던 조부의 뜻을 이어, 그는 아무도 모이지 않는 그 건물을 관리하며 지켰습니다.
아무도 없던 7년 (2000년 ~ 2007년)
그 후 7년 동안 이 교회에는 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역자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당은 낡아갔고,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바깥에서 보기에 이 교회는 끝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돌아보니, 그 7년은 비어 있던 시간이 아니라 준비되던 시간이었습니다.
교회가 비어 있던 그 기간의 한가운데인 2005년, 마흔 넷의 한 사람이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합니다. 지금의 담임목사 최윤식 목사입니다.
“교회가 비어 있고 교역자를 구하지 못한 7년 중에, 하나님께서 이 교회와 저를 살리시려고 2005년에 신대원을 가게 하셨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회복하여 이끄실 계획이 다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최윤식 목사
2007년 11월, 다시 이 자리에서
2007년 11월, 최윤식 목사는 신학대학원 3학년 전도사 시절에 지인의 소개를 받고,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고산교회로 부임했습니다.
부임 당시의 형편은 이러했습니다.
- 교인은 가족뿐이었습니다.
- 예배당은 낡았고, 수리할 자금이 없어 직접 목수 일을 배워 손수 고쳤습니다.
- 마을은 집성촌이었고, 이전에 있었던 좋지 않은 일로 교회에 대한 마을의 인식이 부정적이어서 직접적인 전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의 걸음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시점 | 내용 |
|---|---|
| 2007년 11월 | 최윤식 목사 부임 |
| 2009년경 | 차재국 장로가 교회 건물 명의를 이전 |
| 2010년 | 기도소(祈禱所)에서 교회로 재설립 |
| 2019년 | 현 예배당 건축 |
그러므로 2007년 이후의 일은 새로 심는 개척도 아니고, 무너진 것을 다시 짓는 재건만도 아닙니다. 이 교회가 원래 서 있던 본래 자리로의 복원이었습니다.
지켜낸 것 — 쉬운 설교의 유혹을 이긴 시간
교인이 적고 성장이 더딜 때, 주변에서는 이런 권유가 있었습니다.
“설교가 어렵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쉽게 하라.”
고산교회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귀에 즐거운 설교나 번영 신학 대신, 말씀의 수준과 본질을 지키는 쪽을 택했습니다.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성장이 없는 시간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시간이 무엇이었는지는 코로나19 이후에 드러났습니다. 수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 위기 속에서, 무너지지 않은 교회는 건물이 크거나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도가 그 말씀을 소화하여 뿌리를 내린 교회였습니다.
정체된 시간처럼 보였던 그 세월은, 실은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린 시간이었습니다.
뒤늦게 알게 된 뿌리 (2024년)
여기에 이 교회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이 있습니다.
최윤식 목사는 이 모든 배경을 전혀 모른 채 부임했습니다. 1965년의 차영배도, 빌린 마이크를 들었던 신봉선 전도사도, 네덜란드 흐로닝언 청년들의 손뜨개질도 알지 못한 채 십수 년을 이 자리에서 섬겼습니다.
그리고 2024년, 교단 매거진 『기독교보』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켜온 그 자리가 60년 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헌신 위에 세워진 자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내려져 있던 뿌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받은 줄도 모르고 받았습니다.
이 교회에는 오래전부터 붙들어 온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이사야 58:12
다른 교회에서는 이 구절이 비유로 읽히지만, 고산교회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었습니다.
설립 60주년, 그리고 오늘 (2025년 ~ )
2025년 5월 25일, 고산교회는 설립 6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습니다.
받은 것을 알게 된 교회가 할 일은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표어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표어 — 생명 · 사랑 · 축복의 통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누가복음 6:38
성도가 나눌 수 있는 것 가운데 물질보다 귀한 것이 사랑이고, 사랑보다 귀한 것이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신 복음입니다. 60년 전 이 마을이 받았던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방향은 이미 두 사람의 생애로 증명되었습니다. 후원을 받아 사역했던 신봉선 전도사는 훗날 조성관 목사와 혼인하여 진주 삼일교회를 거쳐 캐나다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이 마을에서 복음을 들은 차재국은 선교언어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먼저 받았기에 흘려보낸다는 말은, 이 교회에서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의 고산교회
| 항목 | 내용 |
|---|---|
| 위치 |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내고산리 |
| 설립 | 1965년 (2010년 재설립, 2019년 현 예배당 건축) |
| 교인 | 30명이 조금 안 되는 규모 |
| 직분 | 장로 1명 · 권사 2명 |
| 성격 | 말씀 중심의 교회, 화목한 교회 |
| 사명 | 예배 · 교육 · 전도 · 봉사 |
교회는 마을 안으로도 뿌리를 뻗어왔습니다. 아동(디딤돌지역아동센터), 청소년 진로상담과 선도, 가족 상담, 장애인 활동지원과 노인 요양보호, 그리고 한국생명의전화 울산지부를 통한 생명 사역까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따라가는 돌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작은 지역이라 불리한 것이 아니라, 작아야 한 사람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배우는 것
고산교회의 설립 배경은 결국 여섯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 60년 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헌신으로 기초가 놓였습니다.
- 그 기초가 황폐해진 자리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 눈에 보이는 성장 대신 말씀의 본질을 지키며 십수 년을 견뎠습니다.
- 그 뿌리 덕분에 코로나의 폭풍에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 뒤늦게 자신이 무엇 위에 서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 이제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로 나아갑니다.
시골의 이름 없는 작은 교회처럼 보이지만,
고산교회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적 약속과 계획 속에서 태어난 귀한 성소입니다.
먼저 받았기에, 흘려보냅니다.
참고 자료
- 고신뉴스 KNC, 「네덜란드-고신 자매교회 이야기(15) ‘코리아 행동대’와 울산 고산 교회」,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2024년 4월 19일
- 교회와신앙, 「이 시대 참 목회자 최윤식 목사와 대담」, 신재철 교수(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본지 편집인), 2026년 7월 24일
- 『더 레포르마치』(De Reformatie), 「코리아 행동대(Actie-comité-Korea)」, 1965년 7월 3일 — 신봉선 전도사의 편지(1965년 6월 9일, 차영배 번역) 수록
